| 일본인 장인을 설득시킨 '거짓말' (8부) |
|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 (8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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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낸 아내는 내내 들떠했다.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했을 땐 울컥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마산역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릴 땐 자판기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가며 흥분했다. "아! 정말 커피는 한국 자판기 커피가 최고야." 편하게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돈 아껴야지"라며 끝내 버스를 고집한다. 결혼식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된다는 거다. 마산에서 올리는 결혼식이다. 뭐가 그리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러는 건지. 나는 부모님 신세를 좀 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마산같은 시골에서는 결혼식 올리는 데 천만원도 안 든다. 게다가 이 돈도 축의금으로 전부 커버된다. 또 나는 장남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천만원 이상이 드는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허락을 맡느냐 못 맡느냐가 중요했었지, 결혼식 부대비용은 부차적 문제였다. 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빠네는 그렇지만 우리는 안 그렇잖아.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식에 못 갈 수도 있고." 장인어른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몇 번 설명했다. 장인어른은 하나밖에 없는 딸의 연애, 동거, 혼인신고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설마가 아니다. 정말로 그랬다. 결혼하고 2년이나 지나도 그의 이런 스탠스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신정연휴 때 우리가 처갓집을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신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세치(お節) 요리와 데마에(出前) 스시를 적당히 먹은 후 바둑만 둘 뿐이다. 항상 이러다 보니 도대체 처음에 아내와의 교제를 허락했을 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라는 의문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때마다 손이 잘못 나가 바둑이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면 장인어른은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요즘 박군 바둑 실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 허허허." 반면 장모님은 우리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하지만 그런 심정을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장모님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거동 자체가 불편해 매일같이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계셨다. 하루에 세 차례 12 종류의 약을 먹어야만 했다. 2000년에 발병했다고 한다. 이 병은 항생제 등을 계속 복용하면 병세의 악화는 막을 수 있지만 완치는 불가능하다. 장모님은 언제나 우리 부부에게 천천히, 떨리는 손을 내 밀며 "잘 지냈나요?"를 물어보곤 했다. 나에게도 항상 언제나 존대말을 쓰시는 장모님. 하지만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장모님의 해외여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혼식 날짜를 잡아도 문제였다. 여차하다간 아내쪽에서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반쪽짜리 결혼식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결혼식 비용 건을 꺼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아내가 한푼이라도 아껴야 된다고 했던 건 처갓집의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 결혼식 비용을 보태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처갓집은 결혼식 비용을 한푼도 대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처갓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사온 선물들, 이를테면 김같은 먹거리, 하회탈 류의 액세서리를 드리기도 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당신들의 딸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았다는 보고도 해야만 했다. 결혼식 날짜는 이후의 문제였다. 딩동딩동. 장인어른이 나왔다. 그는 내 두 손에 가득채워진 선물꾸러미들을 보고 "뭐하러 이런 걸 사왔냐"고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산 김과 액자속에 들어간 귀여운 하회탈 셋트를 받아든 그의 표정이 꽤나 밝아진다.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장모님도 화장품 셋트를 받고는 "고마워요"를 반복한다. 분위기는 꽤나 좋았다. 장인은 nhk 바둑을 보고 있었다. 그는 김 꾸러미를 풀었다. 한 장 맛보더니만 "정말 맛있네"라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한국산 김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지금까지 만나본 일본인들에게 김을 많이 나누어주곤 했는데 김 싫다는 사람 한명도 없다. 그냥 보통 슈퍼마켓에서 파는 도시락용 김인데도 말이다. 장인어른은 김을 한장 두장 맛나게 먹어가며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바둑에 집중했다. 같이 앉아있던 아내가 커피라도 끓여오겠다며 주방으로 나갔을 때였다. 짐짓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아참, 부모님께서 미와코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tv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장인어른이 잠시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부모? 박군 집에도 간거야?" 아, 이런! 여기서부터 설명해야 하다니. 아내는 처가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연락할 정신도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일생에 한번 있을 건곤일척의 대승부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일언반구도 안 했다니. "네. 부모님 댁에 갔어요. 이번엔 거기에만 죽 있었습니다. 미와코가 어머님 일을 많이 도와드리고 해서 우리 집 가족들이 미와코를 아주 좋아했어요." "아, 그래?" 장인어른은 다시 tv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정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되물어 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인정을 받기 위해 생선내장을 발라내는 연습을 매일같이 한 아내가 불쌍해질 정도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오기가 샘솟았다. "네. 워낙 미와코가 잘 해서요. 그걸 보시더니 우리 부모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여기까지 말하고 일부러 한 템포 늦췄다. 몇 초간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자 장인이 고개를 다시 돌린다. "뭐라고 하셨는데?" 궁금해하는 눈치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그런 딸이 처음으로 시댁에 가서 남편쪽 부모님의 칭찬을 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이때 마침 아내가 커피를 들고 거실로 왔다. 커피를 테이블에 놓는 아내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후, 장인께 말했다. "미와코 부모님이 정말 자식교육 잘 시켰다고요. 참 괜찮으신 분들 같다고, 어쩌면 이렇게 슬기롭고 현명하게, 지혜롭게 키울 수 있냐고 하시더군요." 장인보다 아내가 먼저 반응했다. "거짓말! 그런 말을 언제 했어?" "아냐, 진짜야. 자기가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어머니가 그런 말 하셨어." 물론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100% 지어낸 말이었다. 무심한, 너무나도 무심한 장인어른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이런 말까지 했는데 그래도 당신은 바둑만 보겠느냐는 나름대로의 반항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내 말을 들은 장인어른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박군 부모님이 잘 아시는 구만. 그렇지. 내가 미와코 키우느라 고생 많이 했지. 하하하" 아내는 옆에서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어이없어 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절한 거짓말도 필요하다. 면사포는 씌워줘야 한다. 신부쪽 하객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반쪽짜리 결혼식, 최악이다. 내친 김에 더 나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우리 부모님께서 결혼식 날짜를 잡아보자고. 제가 장남이라서 일단은 한국에서라도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장인어른은 흔쾌히 대꾸하셨다. "그럼! 당연히 올려야지."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지금은 나도 아이아빠라 잘 안다. 부모심정은 다 똑같다. 자식 잘 키웠다는 말이 가장 기분좋다. 아침에 아이와 산책 나갈 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이쁘게 키웠어요?'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 장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찬성도 반대도 안하지만, 어른들끼리의 예의는 지킬 줄 알았다. 이건 자기기분, 즉 결혼 자체에 대한 찬성・반대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사회적 예의다. 상대쪽 집안에서 딸 잘 키웠다는 말까지 했는데 결혼식에 안 가겠다, 결혼식 하지 말자고 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튼 마음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갔었는데 이렇게 쉽게, 불과 십몇분만에 허락을 얻어낼 줄이야. 아내도 옆에서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는 듯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몸이 좋지 않으신 장모님도 "결혼식에는 꼭 가야겠다"며 재활의지를 북돋았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아내가 물어 온다. "정말 어머니가 그런 말 했어?" "아니." 눈을 흘긴다. "왜 그런 거짓말 했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럼 넌 부모없는 결혼식 치를꺼냐라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극단적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설득시키는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둑을 연속으로 10판정도 져 주는 방법도 있을테고. 하지만 이런 설명들을 웬지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야. 왜 그랬을까?" 내 대답, 아니 자문(自問)을 듣고 아내가 피식 웃었다. '피식 웃음'. 참 오랜만에 본다. 처음 만났을 때, 아직 서로가 사귀기 전에 우연찮게 찾아간 헌책방(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2부 헌책방 참조)에서 보여준 웃음과 똑같다. 하지만 그 웃음의 속뜻은 전혀 달랐다. 3년전 그 때는 경멸의 의미, 이를테면 "아~, 그랬어요. 어휴, 좋으시겠어요. 참 잘 나셔서" 였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장인어른께 거짓말을 했던 이 때의 '피식'은 적어도 경멸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면 내 손을 쥐면서 자기 머리를 내 어깨에 부드럽게 기대오면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오빠." ◆ ◆ ◆ 금방 올릴 것 같았던 결혼식이었지만 시간이 좀 걸렸다. 원래는 04년 11월쯤에 올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장모님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는 바람에 해를 넘기고 말았다. 구정 때 다시 한국을 찾은 아내에게 어머니는 쌈지돈을 털어 별의별 선물을 사주셨다. 아내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왠종일 어머니의 선물세례를 받았다. 핸드메이드 한복, 다이아몬드, 순금 목걸이에 팔찌 등등. 혼수 개념이었지만 어머니는 절대 혼수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어머니도 참 대단하신 게 혼수가 돼 버리면 양쪽이 주고받는 개념이 돼 버려서 마음껏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즉 아내 집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냥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아내에게 이것저것 사주고 싶은 거다. "이거 정말 다 받아도 되는 거야?" "어. 괜찮아. 해 주실 때 받아." "너무 잘해주셔서 눈물 나올 거 같아." "참고 그냥 고맙게 받아." "으....완전 꽥꿍꽝딱(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10부 한일월드컵 참조)이야." 게다가 어머니는 신용카드가 없었다. 당연히 묵직묵직한 현찰다발이 건네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에서 현찰을 꺼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아내가 귓속말을 해 온다. "근데, 어머님 맨날 손해보신다고 했잖아. 저 돈은 어디서..." 아내는 그걸 믿었나 보다. 추석 때 어머니 일을 도와드렸을 때다. 아내는 어머니가 허구헌날 입에 달고 다니는 "너거 돈 아껴야 한데이", "내가 돈이 어뎄노? 돈이", "아이고 손님, 이거 손해보고 파는 겁니더" 등을 듣고 어머니가 왜 장사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순진하기는. 쯧쯧.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해도 많이 보고 또 현찰다발도 많고 그래" "손해를 보는데 왜 현찰다발이 많은 거지?" "그러게 말야. (먼산)" "......-_-" 이 때 결혼식 장소와 날짜도 정했다. 마산역 앞의 아리랑호텔, 날짜는 약 한달 후인 3월 6일로 했다. 급하게 정해진 이유는 장모님의 몸상태가 눈에 띄게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담당주치의도 무리하지 않는다면 한국여행 정도는 괜찮다는 허가를 내렸다.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처갓집을 찾아갔다. 날짜와 장소 등 결혼식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를 드렸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던 장인어른이 불쑥 결혼식 비용에 대해 입을 연다. "한국은 어떻게 하지? 결혼식 비용. 신부측에서도 내는 것 아닌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안이라 순간 멈칫거렸다. 그러자 아내가 나선다. "됐어.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내 결혼식이니까 내 돈 쓸거야." 아내는 단호했다. 장인어른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내가 단호했던 이유는 우리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내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때 정말 아빠가 미웠거든. 한국이 어쩌네 하면서 결혼식 비용을 넌지시 물어보는 그 계산적인 태도. 오빠네 어머님하고 너무 비교되는거 있지?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한거야." 결국 이런 것이다. 마산의 어머님은 나를 마치 친딸처럼 대해 주시면서 혼수가 아니라 '선물'이라며 아끼시고 또 아끼시던 귀중한 쌈짓돈을 내어 놓으셨다. 국적이나 문화차이와는 상관없는 뭔가를 해주고 싶은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뭐야. 정말 부끄럽더라. 진짜 마음이 있으면 그런 말 안해. 미리 준비했다가 '결혼비용으로 써라'고 딱 내 놓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아빠가 오빠한테 뭘 해 줬어? 맨날 바둑이나 두자고 했지. 하다못해 볼펜이나 취재노트 정도는 충분히 사 줄수 있잖아?"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딱 부러지게 필요하냐 안하냐고 말을 해 주는 게 서로가 속편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국처럼 정이 어쩌네 하면서 한껏 해줬다가 나중에 뒤에서 비교하면서 궁시렁대고 그러는 것 보다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둘이 같이 살면서 아내는 한국 스타일을, 나는 일본 스타일을 서로에게 배운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운명의 3월 6일이 다가왔다.
▲ 큰 아이 미우는 2006년 1월 7일에 태어났다. 2005년 3월 6일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그야말로 허니문 베이비다. 사진은 며칠전 4살된 기념으로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 |